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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조선의 왕 중 방계로 왕위를 이은 왕의 사친을 칭하는 명칭이다.

조선왕들 중 방계로 왕위를 이은 경우는

(성종)
선조
인조
철종
고종

성종의 경우 친부 의경세자를 송나라 영종의 경우에 빗대어 논란이 되었지만 결국 왕으로 추존함. 성종은 세조의 장자이자 왕세자에 까지 오른 상태에서 죽은 의경세자의 아들이었기에 직계로 본다.

성종의 경우 성종 말고도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과 세조의 명실상부한 장손인 형 월산군이 살아있었으나, 정희왕후와 원상-한명회, 신숙주, 권람 등-들의 의견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한명회의 사위라 왕위에 올랐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참고로 한명회의 사위는 신숙주의 아들 신주, 윤사로의 아들 윤반, 예종, 성종이며, 한명회의 부인과 단종의 장모는 친사촌지간이다. 한명회의 측실은 정몽주의 서손녀들이다(첩끼리 사촌).

선조는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친부는 덕흥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선조가 덕흥군의 막내 아들인데 명종이 시험해 보고 똑똑해서 후계자로 정했다는 설도 있고, 장자는 집안을 이어야 하므로 막내를 택했다는 설도 있으나, 덕흥궁의 사손의 경우 반대로 사손이 아들이 없을 경우 동생의 장자를 양자로 들여 계승하게 하고 동생 집안은 차자가 이은 경우도 있었다.

도정궁가는 노론의 물실국혼으로 노론과의 혼인이 많은 집안이다. 조선 후기 왕실 직계가 후손이 적어져 사도세자의 후손 밖에 안남은 상황에서 선조의 서자들이 후손들이 많아 다른 왕자들 집안으로 양자로 출계되는 경우가 많은편이다. 양자는 원래 같은 집안의 가까운 후손들부터 찾기 때문에, 선조 이후 왕들은 대부분 독자 또는 아들이 두셋 밖에 없었고, 인조의 아들 중 인평대군가만이 후손이 있었기 때문에 인조 이후 선조의 아들 후손들 부터 찾은 것이다. 정조 이후는 모두 사도세자의 후손이 왕위를 이었고 친일파가 되는 가까운 왕족들도 모두 사도세자의 후손이다.

인조는 정원군의 아들로 직접 반정을 일으켰고, 왕대비 인목왕후의 교지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선조의 왕위를 누구로부터 이었냐는 종통 문제가 생겨 논란이 되었는데 아들이 없으면 손자가 잇는다는 종법을 적용하여 직접 선조로 부터 종통이 이어지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는데, 친부를 추숭하고 싶은 인조가 밀어붙여 원종으로 추숭되었다. 또한 인조는 세자빈과 손자들을 죽이고 신하들의 반대에도 종법을 무시하고 차남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된다. 효종의 왕위 계승은 이후 예송논쟁이 벌어지는 원인이 된다.

철종은 순조의 양자로 왕위를 잇고 생부는 전계대원군으로 추봉하였다. 전계군은 철종이 왕위에 오른 후 전계군이라는 군호를 얻었다. 왕의 직계 4대손까지는 군호까지는 못 얻더라도 종친부의 작위는 받을 수 있었지만, 전계군의 형 상계군이 정조시절 홍국영의 여동생 원빈의 양자로 가면서 왕위를 넘보는 상황이 되어 홍국영의 실각과 함께 파양당하게 되고 이후 구선복의 역모(현빈 영화 역린 참조)왕으로 추대가 되어 역적의 집안으로 멸문되어 작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서자로만 5대(영조-사도세자-은언군-전계군-철종)인 상태로 평민으로 살고 있었다.

고종은 익종(효명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를 잇고 친부 흥선군은 생전에 대원군에 오르게 되었다. 대원군의 직위는 영의정 보다 높다고 신정왕후에게 판정받게 되어 최고의 실권자가 되었다. 야사에 따르면 원래 경기도 연천군에 있던 남연군의 묘소를 천하 제일의 명당이라는 가야산(충남 서산시 해미면과 예산군 덕산면의 경계)에 절을 불지르고 그 절터에 이장했다는 설이 있다(영화 명당에서 다루는 이야기).